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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말 인사시즌이다. 만나는 사람마다 온통 인사 이야기다. 지난주부터 "이번엔 누구 차례다""어느 자리엔 누가 낙점됐다"는 등 이런 저런 하마평이 나돌고 있다. 하지만 어차피 딴 세상 얘기다. 임원 승진에 대한 기대를 접은 지가 언제인지 이젠 기억조차 가물가물하다.
모 대기업의 A부장. 입사한지 벌써 25년, 부장만 8년 차다. 한 때는 그도 임원이 되겠다는 꿈에 부풀어 있었다. 회사원 치고 누군들 안 그렇겠나. 하지만 서너 차례 연거푸 물을 먹으면서 생각이 달라졌다. 처음엔 때려 치울까도 생각했지만, 그는 자존심보다는 실리를 택하기로 결심했다.
사실 지금 받는 연봉(8,000만원)도 적은 게 아니고, 서울에 40평형대 아파트도 있으니 남들처럼 집 걱정도 없다. 회사에서 지원되는 등록금으로 두 딸도 대학을 이미 마쳤다. 임원이 된다면 더한 영광이 없겠지만, 고시 붙었다고 다 장ㆍ차관이 되는 건 아니고 육사 나왔다고 다 별 다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솔직히 임원으로 승진한 동료와 후배들의 고단한 삶을 보면 오히려 다행이다 싶을 때도 많다. 먼저 올라섰지만 이미 수년 전 회사를 떠난 동료도 여럿이고, 임원으로서 실적 스트레스에 시달리는 것을 보면 '세상에는 공짜가 없다'는 말도 절감한다. 새벽같이 출근해 밥 먹듯 야근하고, 주말조차 반납하고 일에 매달리다 보니 임원 승진 몇 년 만에 병을 얻었다는 주변의 얘기도 심심찮게 들린다. 요즘엔 글로벌 경기침체로 기업들이 비상 경영에 나서면서 구조조정이 재등장, 언제 잘릴지 불안감에 떠는 임원이 한 둘이 아니다.
그런 것에 비하면 차라리 속 편하다. '만년 부장'을 측은히 바라보는 주위의 시선이 따갑기도 하지만 만성화하다 보니 이젠 아무렇지도 않다. 더욱이 특별한 경우가 아니고선 오후 6시 퇴근이 기능하고 주말 휴무도 보장된다. 다행히 회사가 가급적이면 정년까지 보장해주는 분위기라, 퇴출 걱정도 없다.
요즘엔 아내랑 등산도 하며 계절의 변화를 느끼고, '인생 2막 설계'도 준비 중이다. 정년까진 아직 몇 년 남았으니 노후 대책도 준비할 수 있다. 후배들도 예전처럼 임원 승진에 집착하기 보다는 자기 계발과 취미 생활을 더 중시하는 분위기다. 야망과 포부가 있다면 임원에 도전해 보는 것도 좋겠지만, 조직의 생리상 위로 올라갈수록 능력뿐 아니라 '정치'가 뒷받침돼야 하지 않나. 정치에는 태생적으로 소질이 없으니 가늘지만 길게 가는 것도 나쁘진 않다는 생각이다. 실제로 사내에선 그런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하나 둘씩 늘어나는 추세다.
그는 후배들과의 술자리에서 가끔 하는 말이 있다. "까짓 거 임원 못 되면 어때? 나 만년 부장이지만, 그래서 더 행복하다."
이성기기자 hangil@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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